저와 아내는 2001년 7월 7일 토요일에 결혼을 했습니다. 이후로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며 살고 있지요. 철없던 20대 신혼시절, 저의 아버지는 60대, 장인어른께서는 50대셨습니다. 그 시절 아내는 제게 종종 “우리 아빠는 가을만 되면, 쎈티해져요. 그래서 멋스런 바바리 코트를 입고, 낙엽을 밟으며, 가을을 느끼셔…” 라고 말하고 했는데, 그 말에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아이고 …왜 그러신대?” 하곤 했습니다. 아침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감추시곤 하신다는 두 아버지의 모습들을 은근히 비교하며 흉보기도 했지요.
요즘 들어 부쩍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운동을 해도 조금씩 체중이 늘고 뱃살이 부풀며, 피부가 검어지고 주름이 늘고, 머리카락이 빠지며 흰머리가 수북해지는 현상들이야 세월의 흔적이라 느끼며 어렵지 않게 맞이하고 있습니다만, 조금만 감정이 터치되면 눈물이 핑 나는게 스스로가 아주 놀라울 정도입니다^^ 50대(代)를 옛말에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깨닫고, 하늘의 뜻(天命)을 아는 나이가 되었음을 뜻하지요. 그래서인지 아침에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를 들으면 생명의 기쁨이 느껴지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생명의 무상함과 계절의 지남을 느끼며 헛헛함을 더욱 섬세하게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 제가 30여년 전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그 아버지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음을 봅니다. 세월 참 빠릅니다. 2025년이 시작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월의 중반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년 3월은 제게 자숙하는 시간을 갖게 합니다. 아버지께서 천국으로 가신 달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가정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와 맞이한 첫번째 봄방학 마지막날 주일 새벽,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8년전 3월16일 주일 이른 새벽, 한국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선 너머로 “아버지 천국가셨다”는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소리죽여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일 아침이기도 했지만, 봄방학 마지막 날이어서 표를 쉽게 구할 수가 없어 마음을 졸이던 순간들. 막내 하준이를 임신해서 출산을 앞둔 아내를 홀로 남겨둔 채, 수소문해서 마침 여행사를 하시는 지인을 통해 어렵게 한국행 비행표를 구했던 일.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슴으로 부르며 너무나 황망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워 하늘을 날아갔던 30대 저의 옛모습이 떠오릅니다.
새벽마다 홀로 교회 강단에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아시지요..”라고 기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시골길에 동네 사람들이 모내기 하는 것을 보면,그냥 지나치실 수 없어서 심방을 가시다가도 구두를 벗고 바지와 와이셔츠를 주섬주섬 올리시고는 모내기를 도우시던 아버지. 머리에 짐을 이고 걸어가는 할머님들을 보면 차에 내리셔서 짐을 받아서 싣고, 생면부지의 그 어르신들의 댁까지 일일이 태워주시던 아버지. 예수님을 그렇게나 사모하셔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에도 예배에 방해되지 않으시려고 혼자서 담담히 병실에서 마지막 호흡을 거두신 아버지. 시골교회 에서 받던 적은 사례비를 가난하고 힘든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셨던 나의 아버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10년이 두번쯤 지나가나 봅니다. 이제야 “아버지”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그 어깨에 놓인 삶의 무게를, 아버지의 가슴에 새겨진 책임감의 노래를, 더 깊고 넓게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오늘은 아버지가 참 그립네요. 18년 전 주일 새벽을 생각하며, 아버지가 가셨던 그 길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더욱 든든히 걸어가리라 다짐해 봅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든든히 걸어가리라 다시금 다짐해 봅니다.
2025년 3월 16일 아버지를 닮아가는 백성지 목사